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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어떤 국가일까?

역사적으로, 파르스라고 불리던 페르시아는 학문적 상황에서 주로 그 명칭을 사용했었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아랍어의 영향으로 'Fārs'라고 더 자주 언급되었는데, 이는 페르시아어에서의 [p] 소리가 [f]로 바뀌면서 아랍어에서는 '파르스'로 기록되었고, 이 용어는 나중에 페르시아어로 다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예를 들어, 파르시어는 'zabān-e Fārsi'로 표현됩니다).

서방 국가들에서는 '페르시아'라는 명칭을 '이란'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란 자체에서는 주로 '이란'이라고 자국을 칭했습니다. 1935년 3월 21일, 팔라비 왕조의 레자 샤는 나라의 명칭을 이란으로 공식 확정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의 국호 변경이 아니라, 국제적 명칭을 국내 명칭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편, 중국어에서는 '波斯'(파사)로 표현되며, 이는 성서에서 언급되는 바사가 실제로 페르시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 vs 페르시아 누가 이겼을까?

 

유럽 대륙을 통일한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아케메네스 시대의 페르시아는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이란, 중앙아시아 등 독립적으로 성장한 여러 문화권을 최초로 통합한 대제국으로서 세계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대제국의 영향력은 성경에 언급될 정도로 컸습니다. 사산 왕조의 몰락 이후에도, 이란은 이슬람 세계의 일부가 되었지만, 그의 풍부한 문화, 학문, 과학적 업적은 고대 그리스 및 로마와 함께 이슬람 문화의 주요 부분을 형성했습니다.

행정적으로, 이슬람 칼리프 시대에는 아랍인들이, 셀주크 시대부터는 튀르크인들이 군사력을 기반으로 지배를 행사했지만, 실제 정부 운영은 대체로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군대에서는 튀르키어가, 종교인 사이에서는 아랍어가, 그리고 학자 및 관리들 사이에서는 페르시아어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오스만 시대에는 왕실 학교(Mekteb-i Şahane)에서 페르시아어 교육이 기본적으로 이루어졌고, 종교 학교에서 아이들이 코란과 아랍어를 배우는 동안 문해 교육과 기본적인 학문도 함께 가르쳤습니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현재 이란의 국경을 넘어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이라크, 바레인, 시리아 동부, 튀르키예,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러시아의 체첸과 인구셰티야, 다게스탄 등이 포함된 지역은 페르시아 문화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넓은 지역을 현대 이란과 구분하기 위해 대 이란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산 왕조 시대에 확립된 이란의 정체성이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음을 나타냅니다.

현대 이란의 국경과 국제적 위치, 시아파를 국가 종교로 채택한 사실 등은 주로 16세기에 성립한 사파비 왕조 때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흔히 페르시아를 시아파의 발원지로 여길 수 있지만, 실제로 시아파가 이란에서 주류 종파로 자리 잡은 것은 17세기 사파비 왕조 시기부터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페르시아가 주로 수니파였습니다. 특히 10-11세기의 부와이 왕조와 타바리스탄 지역의 몇몇 왕조(알라비, 바반드, 아사신 등)를 제외하고는, 페르시아는 오랫동안 수니파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와 시아파 사이의 역사적 연결고리는 상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또한, 수니파 교리의 기초를 마련한 대 셀주크 제국의 중심 인물인 니잠 알 물크도 이란 출신이었습니다.

 

9세기 아바스 왕조에서부터 11세기의 셀주크 제국, 그리고 14세기의 일 칸국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를 지배한 왕조들은 대부분 수니파였습니다. 이러한 왕조들은 페르시아뿐만 아니라 넓은 영역을 지배하며 광범위한 통치를 펼쳤고, 시아파는 종종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사파비 왕조가 현대 이란의 국경을 형성하고 시아파를 국가 종교로 채택한 것은 이란의 현대적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페르시아 문화는 지리적으로 한정된 영역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은 북인도 동부까지 미쳤습니다. 특히 벵골 지역에서는 벵골 술탄국 시대에 페르시아 문화가 깊이 뿌리내리며, 오늘날의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벵골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르 왕조와 델리 술탄국 시대에는 투르크계 지배층에 의해 페르시아화가 일부 이루어졌으며, 이슬람과 페르시아식 이슬람 문화의 전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페르시아 문화와 이슬람의 전파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줍니다.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력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적 전통에까지 미쳤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여러 지역에서 그 유산을 찾아볼 수 있게 합니다.

 

페르시아는 왜 이란이 되었는가?

고대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파르스 또는 파르사 지역에 살던 부족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한 키루스 대왕이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우며, 파르스 출신의 사람들이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고, 이 지역은 그리스인들에 의해 페르세스 또는 페르시스(Perses), 그리고 페르시아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반면, "이란"이라는 명칭은 인도유럽어 계열의 "아리아"에서 시작되어,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에 이르러 이란인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비시툰과 낙시에 로스탐에 있는 비문에서는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아리아인임을 밝히고 있으며, 고대 페르시아어에서는 아리아(ārya, ariya)로 불렸고, 사산 왕조 시대에 에란(ērān)으로 변했으며, 이것이 현재의 "이란"으로 발전했습니다.

현지에서 오랜 기간 사용된 명칭은 "이란"이었습니다. 이란 지역의 다양한 종족들은 언어적, 문화적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특히 파르티아 시기에 "아리아인"이라는 종족 개념이 넓어졌습니다. 아케메네스 왕조와 파르티아 왕조 모두 다민족 제국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이란계 종족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페르시아"와 "이란"이라는 두 명칭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란의 다양한 문화적, 정치적 정체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